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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니엘 D. 멕케르트의 '화폐 트라우마'
    책|만화|음악 2012. 3. 4. 16:09

    경제학이라면 치를 떨었다. 고딩시절 가장 싫어했던 과목도 정치경제였다. 왜 이깟 속물들의 숫자 놀음에 내 푸르디 푸른 젊음을 할애하며 장단 맞춰야 하나 화가 나기도 했다. 주체할 수 없는 질풍노도의 혈기로 북경호랑이를 때려잡고, 청룡언월도를 철근같이 잘근잘근 씹어먹으며, 달리는 적토마에서 뛰어내려 창대한 꿈을 포효하던 그 시절, 이런 돈놀음쯤이야 의리와 우정, 사랑과 정의 앞에선 철저히 무릎 꿇을 거라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사정도 변했고. 그때 나이의 따블쯤 먹고나니 이노무 세상 그리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았다. 동화 속의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라는 해피엔딩 따윈 재벌이 독점한지 오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우리네 인생 런어웨이에선 일일연속극 속 빈티지한 막장테크나 호러적인 상황의 신용등급을 걸치는 게 블링블링하니 더 잘 어울린다는 걸 깨달았다. 알량한 이팔 청춘만만세의 산뜻한 바램과 원대한 포부는 잿빛 현실 앞에 산산조각나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안드로메다 저 멀리 사라져 버렸으며, 내 앞엔 형편없는 통장잔고와 취직, 결혼, 육아 문제와 같은 묵직한 현실의 책임만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무게 또한 만만치 않은 건 IMF와 서브 프라임이라는 두 번의 경제 한파 속에서 탄생한 88만원 세대의 눈물을 보너스로 두둑히 머금었기 때문이라.
     
    그래서 그리도 꺼려하던 경제학 서적에 눈을 돌렸다. 타협이 아닌 필요였고, 허세가 아닌 성장이었으며, 도피가 아닌 도전이었다. 경제적인 지식과 센스가 가히 서울대 야구부 승률만큼이나 떨어지는 나였지만, 다니엘 D. 엑케르트의 [화폐 트라우마]는 다행히도 그리 어렵고 복잡한 책은 아니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역사에 주목하여 각 나라별 상황을 통해 화폐의 매커니즘과 흐름에 대해 설명하고 분석한다. 이 책은 크게 달러와 위안, 유로와 금이라는 4가지의 국제적인 통용가치를 통해 세계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경제 상황을 한방에 펼쳐보이는 구글맵과도 같다. 명쾌한 문장과 신중한 논리로 금본위 중심의 과거 막강한 체제가 어떻게 바뀌고 무너져 왔는가 각 나라별 화폐의 시점을 통해 복기해낸다. 그 속에는 미국의 대공황과 유럽에서 발생한 두 번의 대전쟁. 중국의 변화무쌍한 화폐 붕괴, 금과 은의 쓸쓸한 퇴장과 몰락 그리고 부활 같은 역사적 배경이 지대한 영향력을 끼쳐왔음을 밝히고, 앞으로 세계 경제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할 수 있는 힌트와 견해들을 나열한다. 물론 저자가 미국인이 아닌 독일인이라는 점, 또한 제계에 직접 몸담고 있는 인물이 아닌 경제 부문 기자라는 점에서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방안이나 밀접한 속내까지 드러내진 못하지만, 오히려 그런 포지셔닝으로 인해 현재 닥치고 있는 유로화 위기에 대한 유효적절한 코멘트와 달러화 약세를 바라보는 외지인의 불안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함께 읽어낼 수 있다.
     
    물론 다른 많은 경제서들처럼 이 책 또한 상세한 해답지와 뛰어난 적중률을 공개하진 않는다. 타임머신을 타고 백 투 더 퓨쳐를 하지 않는 이상 결코 그럴 수 없다. 하지만 강대국들 간의 이해 관계와 역사를 통해 화폐들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와 약점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그 궤적을 따라 현재를 재구성하며 내일을 예측할 수 있다는 건, 더 큰 혜안과 방편을 마련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달러, 위안, 유로, 금이라는 제한된 화폐에 집중하지만 그 이면의 이와 관계된 일본 시장의 호황과 거품, 한국을 포함한 네 마리의 용의 추락과, 독일과 프랑스, 영국 간의 미묘한 신경전 등 디테일한 세계 경제의 이슈들을 잘 집어내 흥미를 자아냈다. 미국과 중국의 헤게모니 다툼 속에 고스란히 노출된 우리네 상황 역시 신중하고 노련한 장기적인 안목의 포석 또한 역설한다. 종이와 금속조각에 불과한 화폐가 이처럼 강력한 생명력을 얻어 세계를 쥐었다 폈다 활보할 거라 예측한 이들은 과연 통제 불능의 상황까지도 계산에 넣어두었던 것일까. 전쟁을 통해 리셋한 그 불안한 출발점이 만들어낸 고비가 다시 한번 닥치고 있다. 총과 칼, 핵무기 대신 화폐와 가치로 중무장한 새로운 전쟁이. 그 변곡점에서 마주한 이 300페이지 남짓의 핵심적이고 친절한 안내서의 가치는 참으로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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