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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이네 담벼락의 '한 개의 달 한 개의 마음'
    책|만화|음악 2011. 12. 4. 15:31

    반짝이는 멜로디는 없다. 톡쏘는 향기처럼 중독될 후크도 없고, 심지어 그루브한 리듬감이 몸을 자극시키지도 지배하지도 않는다. '순이네 담벼락'은 이름만큼이나 촌스럽고 투박한 감성을 지녔고, 당혹스러울만치 자기네들의 비정형화된 사운드를 고집한다. 강렬한 기타 연주 속에서 피어나는 피아노의 영롱하면서도 노스탤지어를 간직한 따뜻한 음색은 대중적인 기대를 저버린 채 어둡고 힘든 일상으로 훌쩍 떠나버린다. 거기에 여리여리한 리드 보컬의 가녀린 목소리는 언제 꺼져버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들려온다. 폭풍을 목전에 둔 길가의 민들레처럼 세차게 흔들리며 불안하게 귓가로 흐트러져간다. 파워풀한 스토로크와 열정적인 터치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감에도 남는 건 짠한 공허함과 울적한 허무함이다. 평범하지만 공감 가는 가사말을 두고두고 곱씹으면 칡뿌리처럼 텁텁한 뒷맛마저 안긴다. 이름처럼 그들은 쉽게 다가오는 만만한 밴드가 아니다. 서먹서먹하면서도 슬쩍 눈을 돌려 자리를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던, 학창시절 미지의 전학생 같은 존재감의 밴드다.
     
    피아노팝과 모던락의 경계에 있지만 Ben Folds나 Keane과는 전혀 다른 - 격한 수줍음과 서정적인 폭발력을 동시에 들려주는 - 얼터너티브 성향의 '순이네 담벼락'은 두 대의 기타와 베이스, 키보드(피아노), 드럼으로 이뤄진 5인조 밴드다. 귀에 익은 리듬과 손쉬운 멜로디에 집착하기보단 가사에 맞는 심상과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그들의 노래들은 감성적이지만 일상 속 젊은 나날의 불안과 심리를 잘 묘사해 '순이네 담벼락'만의 소소하면서도 고고한 아우라를 지니게 한다. 나무랄 데 없는 연주력과 멤버들 간의 좋은 호흡은 인상적이지만, 종종 지나치게 여리고 개성없는 보컬이 곡을 장악하지 못해 생기는 간극이 불안하고 아쉽게 느껴진다. 이러한 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메인보컬인 백수훈 외에 멤버 김석영과 성종훈, 객원 여성 보컬인 윤사과의 싱그러움을 투입하지만 아무래도 확고한 프론트맨을 둬서 밴드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편은 어땠을까 싶었다. 그러나 반복해 들을수록 어쿠스틱한 포크 감성과 얼터너티브의 기운을 동시에 두른 이들 스타일로 봤을 때 그 야누스적인 혼돈이 오히려 밴드의 색깔을 굳힐 수도 있겠다 하는 기대감으로 변했다.

    총 14곡, 66분에 이르는 런닝타임이 말해주듯 빼곡히 들어찬 노래들이 알차다. 타이틀곡이자 앨범 제목이기도 한 '한 개의 달 한 개의 마음'은 순이네 스타일을 명확히 점지할 수 있는 곡으로 영롱한 기타와 피아노가 어우러진 모던락이다. 후렴에 이르러 강렬하게 몰아치는 폭풍 기타와 다르게 섬세한 보컬의 대비가 가사말의 아련한 느낌과 상쇄돼 짙은 잔상을 길게 남긴다. 나른하고도 몽롱한 기운으로 다가오는 '낮잠' 역시 후반부에 이르러 고조되는 진행이 날카로운 잔향을 남기는 곡. 잠 속에 담긴 일말의 불안감과 혼돈을 느끼게 하는 기타의 울림이 매섭다. 체념적인 고백이자 달관한 듯 이겨낸 가사가 너무나도 서글프면서도 다행이라 여겨지는 '어떤 날'은 피아노와 기타의 서늘한 매력이 잘 살아난 노래다. 잊혀짐에 대해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된다면 이 노래를 선물하겠다. 그 뒤를 잇는 건 서정적인 포크락 성향이 두드러진 '고래의 습격'이다. 시련과 좌절, 고통 등 그 어떠한 장애를 상징하는 고래를 넘어서기 위한 조그마한 인내와 용기를 곱씹게 만드는 가사가 곱씹을만 하다. 그러나 '거위의 꿈'이나 '시계태엽 속 돌고래', '소금인형' 같은 비슷한 성향의 노래들과 달리 소극적이고 건조하며 자조 어린 독백에 가깝다.

     
    싸이키델릭하게 휘몰아치는 기타 인트로가 끝나자마자 침전된 듯 가라앉은 분위기로 시작하는 'Present'는 선물이란 단어가 주는 기쁨과 달리 아이러니한 상황과 소소한 행복이 공존하는 가슴 시린 애가다. 자조와 슬픔, 희망이 공존하는 순간, 기타의 아련한 울림이 기묘하게 파고든다. '고백'이란 로맨틱한 상황을 전혀 로맨틱하게 담아내지 않는 이 음울한(?) 듀엣곡은 윤사과와 백수훈이 함께 부른 마이너 포크락. 별이 빛나고 달이 춤을 추며 또 어둠이 묻어나고 비로소 바람이 불어도 함께 할 거라는 남녀의 축복이 이렇게나 어두울 수 있다는 데 깜짝 놀란 - 독특한 심상의 노래다. 첫 키스에 얽힌 가슴 시린 추억을 반추해낸 '첫 키스' 역시 순이네만의 서늘한 애상이 느껴지는 곡. 가끔 이런 스타일에 소름이 돋곤 한다. 앨범에서 가장 발랄하고 유머스러운 분위기를 전달하는 '퇴근여행 5분전'은 리드 보컬 백수훈 대신 앨범의 거의 모든 곡을 작곡한 성종훈이 보컬로 참여한 모던락이다. 얇고 섬세한 톤의 백수훈과 달리 나른하니 성긴 목소리의 성종훈은 그간의 느낌과 달리 보다 밴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화자의 울먹거림이 그대로 전달되어지는 '엄마'는 가사의 슬픔만큼이나 강렬하게 울어주었다 조용히 삭히기도 하는 기타의 완급조절이 무엇보다 귀에 들어오는 노래다.

    2집 앨범부터 새로 합류한 김석영이 작사/작곡/노래한 '서울의 밤'은 몽롱한 신디톤으로 밤의 기운을 묘사하며 적적한 도시의 외로움을 담아낸다. 메인 보컬인 백수훈만큼이나 섬세하고 절제된 톤이지만 그의 젖은 사포처럼 꺼끌하니 고독한 울림은 또 다른 감성을 선사한다. 애잔한 피아노로 포문을 여는 '별리'는 김석영과 윤사과 함께 부른 이별에 대한 듀엣곡으로, 점차 고조되어가는 감정의 격정이 고스란히 표현된 노래다. 곡 길이에 비해 단조롭고 지겹게 느껴지는 진행이 다소 아쉽다. '열두시에 사랑을 외치다'는 타이틀곡 '한 개의 달 한 개의 마음'과 '퇴근여행 5분전'과 비슷한 분위기로 돌아간 모던락 러브송으로 새벽에 강변도로를 창문 열고 달리는 기분만큼 시원스런 매력이 느껴진다. 앨범에서 가장 이질적인 트랙이라 감히 말할 수 있는 윤사과의 '그해 여름날'은 디지털 싱글로 먼저 선보인 곡으로 상큼한 보이스와 편안한 기타, 리드미컬한 까혼이 어우러지며 귀여운 시즌송을 만들어냈다. 차라리 앨범 맨 마지막 히든 트랙으로 담아주었다면 통일성 면에서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엔딩을 장식하는 '서른에게 보내는 편지'는 윤사과와 백수훈의 듀엣곡으로 델리스파이스의 '챠우챠우'처럼 단 한 문장의 가사로 이뤄진, 그리고 반복하는 노래다. '시간이 자릴 내주고 마음이 그 자릴 채우네'라는 모호한 가사만큼이나 독특한 매력을 안겨준다. 그간의 강렬함과 우울한 색채와 달리 컬러풀한 감성과 그루브가 인상적이다.
     
    '순이네 담벼락'은 높지 않다. 두껍지도 않고, 얇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낮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중 음악 속에 확실히 자신들만의 담벼락으로 영역표시를 해냈다. 듣는 청자에 따라 그 담벼락 넘어 살고 있는 순이와도 만날 수 있을 거고, 설령 만나지 못한다 해도 그리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다음에 더 좋은, 더 새로운 담벼락을 쌓아올려 자신들을 보여줄테니까. 중요한 건 담벼락을 발견하는 일이다. 난 비로소 두 번째 앨범에서야 그들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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