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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너스의 담요의 'Show Me Love'
    책|만화|음악 2011. 9. 15. 08:27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쩜 '라이너스의 담요'의 뽀송뽀송한 사운드는 그대로인지 참으로 미스테리하다. 하다 못해 털이 좀 빠지던가, 색이 바랠 법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은 못 느끼겠고, 지금 막 섬유유연제를 넣고 울세탁을 마친 담요마냥 보드럽고 말랑말랑하니 기분 좋은 음악들이 한가득이다. 이 담요가 수상하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해리포터 첫 편이 상영되던 그 해 결성된 이들이 해리포터 마지막 편이 상영된 올해에야 비로소 첫 정규 앨범을 발표했으니, 2001년 빈티지 와인 숙성도 아니고, 가녀린 미성의 소유자 연진이 육십갑자 내공을 길러 득도한 사자후를 펼쳐보일 것도 아니기에, 그간의 공백기와 잠수에 대해 슬쩍 의구심을 가져볼만도 하다. 허나 음악에 대한 고민과 생계에 대한 현실 그리고 지독한 완벽주의 삼위일체가 맞물려 준비 기간이 길어졌을 뿐, 5인조로 시작했던 그때나 연진과 상준 멤버 둘만이 남은 지금이나 사실 별 다를 바 없기에, 결성 십년만에 내놓은 첫 정규 앨범임에도 2003년 처음 발표했던 싱글이나 중간중간 참여한 컴필레이션 앨범 때나 엇비슷하게 들린다.
     
    아니, 사실 그들은 (미묘하게) 달라졌다. 달달하고 기분 좋은 서정성의 팝의 기조는 여전하지만, 스윙과 보사노바, 재즈의 아우라를 덧입힌 복고지향적인 연주의 튼실함과 견고한 사운드메이킹의 지향점은 보다 원형질에 가까워졌다. 시간이 그저 흐르기만 한 것이 아닌 게 초창기에 그들이 지향했던 그 따스한 방향성이 정규 앨범에 들어서며 완벽하게 컨셉과 균형으로 발현된 셈이다. 긴 작업 시간에 비해 여전히 소박한 스케일에 다소 실망할지 몰라도, 실상 그 분위기를 창출해내고 오롯이 자기만의 스타일로 풀어낸 해석과 깊이 있는 연주는 바로 그 긴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지도 모른다. 라이너스의 담요는 여전히 보드럽고 말랑말랑하지만, 오래된 담요에게서 느껴지는 세월의 윤기와 그 특유의 풍취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인위적이고 어색한 더께와 깊이가 아닌, 진짜의 매력이다. 우리는 한번도 가져본 적 없고, 경험해보지 못한 아메리칸 스타일의 레트로 사운드다. 과연 이들의 정규 앨범을 제대로 듣고나 죽을 수 있을지 반농담 반우스개 삼아 중얼거리곤 했는데, 이처럼 뛰어난 아날로그 퀄리티로 만족시켜주다니... 긴 기다림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경쾌한 도입부는 'Rag Time'이 맡고 있다. 짧지만 제목답게 발랄한 피아노 사운드가 전면에 나서는 연주곡으로, 앨범에 대한 성격을 맛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전체요리라고 보면 좋을 듯 싶다. 이 분위기를 고스란히 이어나가는 두번째 트랙 'Show Me Love'는 본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신명나는 스윙 스타일을 차용한 팝 사운드를 선사한다. 로큰롤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기타와 열정적인 브라스 섹션의 조화가 연진의 사랑스러운 보이스와 어우러지며 달달하니 다가온다. 검은치마 조휴일이 나른한 듯 힘 쫙 빼고 연진과 듀엣으로 부르는 'Gargle'은 유쾌한 듯 장난스런 재지의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지는 곡. 아기 코끼리 같은 튜바 소리와 제목처럼 중간 간주에 등장하는 피아노와 와우와우~ 허밍이 재밌다. 워낙 동명의 노래들이 많지만 라이너스의 담요만의 'Misty'는 고혹적이거나 축축하니 희뿌연 침전된 느낌이 아닌, 기분 좋은 편안함을 선사한다. 기타와 콘트라베이스, 브라스, 브러쉬 터치의 드럼이 만들어내는 그 아침 안개 같은 담담하니 밝은 사운드가 일품이다.
     
    이들의 가장 큰 히트곡이자 데뷔 싱글에 실렸던 'Picnic'도 새로운 버전으로 돌아왔다. 무려 스윗 소로우가 코러스로 참여한 이 노래는 원곡의 통통 튀던 깜찍발랄한 기운을 조금 순화시키는 대신 보이스를 강조해 휴머니즘 가득한 편안함을 부각시킨다. 전 버전이 동생 손 잡고 동네 마실 나서는 기분이라면, 이번 버전은 부모님과 함께 근교에 놀러가는 휴일의 느낌이랄까. 그 뒤를 잇는 'Labor in vain' 역시 두 번째 싱글에 이미 소개됐던 노래. 원곡의 담백하니 정갈한 보사노바가 그루브감 충만한 산들바람 느낌의 보사노바로 탈바꿈했다. 늦여름 아직 남아있는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콧노래 흥얼대고 여행 떠나고 싶어진다. 앞서 소개된 모든 곡들이 영어 제목에 영어 가사였다면 한글 제목에 한글 가사인 '순간의 진실'과 '고백'은 이들의 다소 획기적인(?) 변화다. 더군다나 '순간의 진실'에선 상준이 메인 보컬로 나서는 곡으로 잔잔하면서도 소소한 분위기가 참 푸근하다. 과거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분위기를 위해 등장하는 프렌치 팝 스타일의 빈티지 코러스와 리버브 이펙트, 브라스 섹션의 조화는 매우 인상적이다.

    일렁이는 듯 깔리는 신디와 몽환적인 분위기의 '고백'은 연진의 가라앉은 듯 담백한 보이스 톤의 노래로 'Misty'와는 또 다른 희뿌연 밤안개 속을 거닐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귀엽고 달달한 어감을 위해 그간 영어 가사를 고집해왔다는 신념(!)과 달리 한글 가사도 제법 그들에게 잘 어울린다. 그 뒤를 잇는 'Music Takes Us To The Universe'는 아날로그틱한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가장 이질적인 일렉트로니카 사운드. 진공악단과 속옷밴드의 멤버이자 솔로로 특유의 분위기를 선사하는 조월이 어렌지 겸 프로듀싱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연진의 보컬이나 라이너스의 담요 정체성을 크게 헤치지 않는 건 그 특유의 사랑스러운 달달함과 뽕발 나는 복고지향적인 시선이 유효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라이너스의 담요만의 달달한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Stop Liking, Start Loving'는 사랑스러운 소품. 연진의 매력적인 보이스가 기타와 일렁이는 키보드와 만나 소소한 감정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그리고 있다. 중독성 있는 코러스는 뽀나스. 대망의 엔딩을 장식하는 상큼발랄경쾌한 'Walk'는 영화 [연애의 목적] 예고편에 쓰였고 두 번째 싱글에 실린 원곡의 롱 버전. 달콤한 멜로디와 그루브한 리듬이 어깨를 들썩이게 만든다. 발군의 연주력과 내공을 느낄 수 있는 킬러 트랙.
     
    또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한가. 십 년간 기다렸으면 됐지. 당분간 난 질릴 때까지 이 달콤하고 포근한 '라이너스의 담요'를 덮고 자고, 들고 다니고, 쭈욱 생활할 거다. 단 하나 이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한 가지. 다음 정규 앨범은 제발 빨리 나오길. 제임스 카메론 영화도 아니고 너무 텀이 길잖아.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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