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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은의 'Bliss'
    책|만화|음악 2011. 9. 8. 07:16

    이상은은 부지런하다. 88년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거머쥐며 아이돌스럽게 데뷔한 이래 영화, CF, 드라마까지 출연하다 90년대 중반 아티스트로 대격변을 거친 후 패션, 미술, 디자인, 책 등 예술 전방위로 발을 넓힌 지금까지 꽤나 드라마틱한 사연 속에서도 그녀는 꾸준히 앨범을 발표해왔다. 그것도 매년, 혹은 2-3년을 주기로, 싱글이 아닌, 10곡이 넘고, 1시간이 넘는, 푸짐스런 한 차림의 정규 앨범 14장과 B-사이드 앨범 1장, OST 2장을 만들었다. '담다디'나 '사랑할거야', '언젠가는' 같은 온 국민이 따라부르던 메가 히트곡은 줄었지만, '공무도하가'나 '어기여디어라', '비밀의 화원' 같은 자신만의 보헤미안스러운 특징이 극대화된, 동양적이여서 오히려 코스모폴리탄적인 색채를 지닌 독특한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그녀에 대한 대중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뜨거운 관심은 비록 식었는지 몰라도 그녀의 소신있는 목소리와 자유로운 영혼의 노래는 아직 식지 않은 채, 아니 되려 더 불타오르는 듯 다양한 시도와 실험들을 거듭하고 있는 셈이다.
     
    남들에 비해 조금 늦긴 했지만, 그녀의 첫번째 싱글이자 리믹스 앨범인 'Bliss'는 그 열정의 산물이다. 기존 11집 앨범 [신비체험]에 수록돼 CM송으로도 쓰인 '비밀의 화원'과 바로 전에 발표한 14집 앨범 [We are Made of Stardust]에 실린 'Bliss' 두 곡을 DJ은천과 박과장이란 재능있는 뮤지션과 조우해 독특한 콜라보를 이끌어냈다. 사실 그 단초가 느껴진 건 바로 전작 앨범에서 들려지던 일렉트로닉 사운드였지만, 건축가 출신에 대형 이벤트 음악감독을 맡고, 윤상과 루시드폴과도 작업한 DJ은천과 영화, 게임, 뮤지컬과 TV 같은 매체에서부터 인디씬까지 음악이 존재하는 필드 내에서 다방면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박과장은 그녀의 주문에 따라 기존 곡의 색채를 지워버리거나 확대 버전 업을 통해 전혀 다른 분위기와 뉘앙스로 재조립해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곡인 동시에 처음 듣는 곡이라는 기시감과 생경함의 이중적인 조합이 생생히 살아 몽환적이고도 신비한 기운을 전달한다. 그리고 그건 디지털 싱글이라는 매체에 진짜 걸맞는 찬란한 음표 오로라이자 광활한 비트감의 스페이스 오페라다.

    초반은 'Bliss'의 몫이다. 오토튠으로 변조된 보이스와 일렁이듯 반복되는 기타가 코러스와 함께 펼쳐지는 원곡의 몽환적이고 담백한 분위기는 극적으로 확장되고 아름답게 증폭되었다. DJ은천이 만진 Emerald Catstle 버전은 마치 새까만 하늘에 떠있는 별빛이 쪼개지듯 시리게 산란되는 신디 사운드와 심장박동처럼 단단하게 느껴지는 비트감이 어우러지며 황홀한 청각의 시각화를 창출해낸다. 이펙트 걸린 코러스마저 아련하게 멜로디를 감싸며 무한대로 펼쳐진 우주 속을 천천히 유영하듯 신비롭게 다가온다. 반면 박과장이 매만진 Azian P 버전은 공감각적인 스케일을 키운 신디가 더 화려하고 자유스럽게 부유하며 스트링의 임팩트를 강렬하게 펼쳐보인다. 꽉 채웠다가 확 비우는 능수능란한 조율과 기타와 베이스의 탄탄한 그루브감은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곡에 청량한 긴장감을 선사하고 있다. 마치 종교적 체험이라도 한양 소름이 돋고, 명징한 사운드에 영혼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이처럼 같은 곡을 다르게 변주해낼 수 있는 그들의 해석력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후반은 '비밀의 화원'의 몫. 심플한 베이스에 현악 브릿지, 단아하고 부담없이 소화하는 이상은의 보이스가 잘 어루어진 원곡은 일상다반사의 기쁨을 담아낸, 기름기 쫙 뺀 경쾌하고 편안한 모던락 풍의 노래였다. 이를 DJ은천은 Toy Garden 버전이라는 이름의 칩튠 스타일로 독특하게 풀어내는데, 오락실에서 들릴 법한 각종 효과음들과 장난스런 음색들로 원곡의 느낌을 완전히 제거했다. 마치 과거 YMO의 노래를 듣듯 복고지향적인 느낌마저 선사하는데, 그 과도한 실험성과 산만한 스타일이 과연 사소한 즐거움의 공간인 일상에서 신비로움을 발견하는 원곡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가에 대해선 이견이 분분할 듯 싶다. 굳이 이런 레트로 스타일의 전자음악을 추구해야 했었나 방향성에 대한 의구심일텐데, 신해철의 '일상으로의 초대'를 떠올려본다면 칩튠의 소박한 매력과 장난스런 분위기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Bliss'가 원곡의 느낌을 극대화시켰다면, '비밀의 화원'은 전혀 다른 스타일로 치환하는 전략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새로운 시도 또한 계속된다. 지금의 이상은을 보며 생각해본다. 지금의 수많은 걸그룹 아이돌 중에서 과연 그녀 같은 길을 걸어갈 만한 여자 아티스트가 나올 수 있을까? 천만에. 그러기에 이상은은 더 없이 소중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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