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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민아의 '오아시스'
    책|만화|음악 2011. 7. 30. 04:49

    가야그머. 가야금 연주자를 뜻하는 말. 익숙하면서도 생소하다. 지금 전통이라는 단어도 그렇게 이중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건 아닐까. 머리로 알고는 있지만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는 그런 막막한 단절감이 엄습한다. 만약 아이돌만큼이나 국악이 사랑받았다면 그녀의 존재감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었을 거다. 벌써 3집 앨범을 낸 정민아는 앞선 앨범들에서 그 고민과 실험들을 진지하게 담아낸 바 있다. 1집 '상사몽'에서 국악이라는 틀을 가져와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재해석하고 창조했다면, 2집 '잔상'에선 보다 퓨전적인 성향의 기품있는 연주와 새로운 소리에 대한 집착을 들려주었다. 국악 전공자로 전통 음악을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에 대한 부던한 노력과 시도는 분명 긍정적이고 박수 받아 마땅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현재의 국악이 대중과의 소통에서 철저히 실패했기 때문에 변화를 받아들이게 된 건 아닌가 싶어 한편으론 씁쓸해진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 앨범에서 그 경계와 장르를 벗어던져 버린다.

    이건 국악도 아니고, 포퓰러 뮤직도 아니다. 크로스오버라 하기엔 그 퓨전의 색이 지나치게 옅다. 기타줄을 튕기며 서정적으로 삶을 노래하던 포크처럼, 그녀 역시 가야금을 연주하며 2011년 한국의 일상을 담백하니 해학적으로 이야기한다. 일종의 한국식 포크다.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새 장르, 바로 모던 가야금이다. 가야금이라는 악기의 가능성을 타진하던 크로스오버적인 성향의 1집과 실험적이고 대안적인 차원의 포스트-국악을 띈 2집을 넘어 이번 앨범에서 그녀는 본격적인 자신의 노래를 꺼내보인다. 가야그머로서가 아닌 싱어송라이터이자 음악인으로 선보이는 이 신선한 노래들은 그래서 정민아의 가야금 테크닉이나 활용도가 중요치 않다. 오히려 이전 앨범들에 비해 더 소극적이고 뒤로 물러나 있다. 대신 단어의 운율을 한껏 살리고 한과 해학을 담아낸 가사와 변칙적이면서도 단아한 멜로디가 가야금 음색보다 더욱 강력한 우리 고유의 색채를 들려준다. 그녀의 한국적인 소리에 대한 탐구는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다.

    낭창낭창한 가야금 소리가 유려하게 퍼져나간다. 둔중한 베이스, DJ 믹스가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오묘한 분위기는 '여름날에 몽롱한' 제목 그대로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단어들이 마치 구술적인 주문처럼 다가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편안하면서도 독특한 감성의 사운드를 각인시키는 그녀만의 인상적인 첫인사인 셈이다. 첫 곡이 명확하게 정민아의 색깔을 드러냈다면 유일하게 수록곡 중 가사가 없는 연주곡 '환타스틱'은 그 색채를 더욱 공고하게 증폭시킨다. 바람곶의 원일이 피쳐링한 꽹과리와 장구가 흥을 돋구면 곧이어 아코디언과 가야금이 화기애애하게 만나며 월드뮤직스러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짧지만 경계를 넘나드는 임팩트와 음악적인 재미가 1-2집 때 보여줬던 그대로다. 조금 달라진 면을 맛보고 싶다면 이 이후부터 등장하는 노래들 가사를 눈여겨 보면 된다. 기존곡들을 재해석하고 연주곡 중심이었던 1-2집과 달리 그녀만의 가삿말이 드러나는 이번 3집의 노래들은 소소하면서도 해학적인 재미와 아련하고 뭉클한 한이 있다. 보사노바 리듬에 장단을 맞추는 가야금이 빛나는 '예예예'나 그 뒤를 잇는 '주먹밥'은 노래도 노래지만 무엇보다 가사를 빼놓곤 말할 수 없다.

    동요스러운 천진난만함이 묻어나는 '예예예'의 유쾌하고 따스한 감수성도 아름답지만, 삶의 노근노근한 모습이 진솔하게 묻어나는 타이틀곡 '주먹밥'의 가사는 송창식의 '담배가게 아가씨'나 노라조만큼의 해학과 슬픔이 동시에 묻어난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와 망했네 망했네 망했네를 연발하는 우스꽝스럽지만 솔직한 감정의 코러스는 가련한 생계형 인디 뮤지션의 비애와 처지를 함축적이고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를 담담하니 소회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백미! 그 뒤를 잇는 '고래공포증'은 우아하고 단아한 스윙감을 지닌 재즈 스타일의 곡. 후반부 물 속을 부유하는 듯한 영롱한 사운드의 펜더 로즈가 베이스, 가야금과 함께 빚어내는 사운드의 질감이 아주 매력적이다. 시적인 가사와 줬다 폈다 강약을 살린 회색빛 보컬은 컬컬하니 마음에 잊을 수 없는 스크래치를 낸다. 이미 2집에서 좋은 호흡을 맞춘 바 있는 프렛리스 베이스 서영도와의 협업이 빛나는 '오아시스'에선 보다 전통적인 색채로 돌아선다. 앞선 곡의 스윙감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애잔하기 이를 데 없는 해금의 처량맞은 소리나 어이야 이어라 부르는 그녀의 스캣은 전통적인 민요에서 감지되는 기운들이다. 몽환적이면서도 스산한 기운이 물안개처럼 다가와 축축히 마음을 적신다.

    서정적인 스윙은 계속된다.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가사의 '비밀' 역시 프렛리스 베이스를 기반으로 꿈결 같은 모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담백하던 정민아의 보컬은 느릿해지며 블루지한 음색으로 변모해 외롭고 쓸쓸한 기운을 던진다. 전반부의 밝고 명랑했던 정서는 어느새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떨어지며 짙은 음영을 남긴다. 전화연결음으로 시작하는 '은미이야기'가 바로 그 정점이다. 간결하지만 함축적으로 느껴지는 가사는 시선의 객관화를 통해 더 큰 슬픔을 농축하고 있고, 단조롭지만 몇번이고 반복되는 멜로디에 복잡한 내면을 상징하는 듯 구술프게 맴도는 가야금의 울림만이 은미를 위로하듯 춤을 춘다. 마지막 트랙 '봄이다'에 이르러서도 그러한 절망 가득한 현실에 대한 한탄과 자조는 계속되지만, 그래도 지금은 봄이라는 현실을 지시하는 곧은 시선만큼은 희망적이다. 그런 애잔한 심상이 담긴 멜로디언과 간주 중에 울려퍼지는 가야금의 합주는 처연한 아름다움, 우리만의 한의 정서에 담긴 미학마저 느껴진다.  

    곡 하나하나 유기적으로 작용하며 점차 어두워져가는 전체적인 통일감도 좋고, 가야그머라는 사실에 함몰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고 싱어송라이터로서 역할을 온전히 보여준 실력도 뛰어나다. 그러면서 한국적인 소리와 현실을 오롯이 담아내는 뚜렷한 시선과 노력을 느낄 수 있어 감동했다. 한국식 포크 사운드이자 국악재즈로서도 손색없고, 좋은 크로스오버이며, 개성 넘치는 인디 뮤지션인 동시에 포스트 국악인으로서 그녀가 전달하는 모던 가야금은 정체된 현 음악시장에 좋은 대안이자 롤모델이 죌 것이다. 문득 힘들지만 좌절하지 않은 정민아가 만든 주먹밥이 맛없어도 먹어보고 싶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망했네 망했네 망했네를 중얼거리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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