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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e Young의 'So Sudden'
    책|만화|음악 2011. 4. 29. 21:57

    봄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다. 꽃샘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난 뒤, 뜬금없이 3월말에 내린 흰 눈 사이로, 학기초 처음 만난 짝꿍과 친해져 같이 하교할 때쯤에. 라일락 향기가 동네 어귀 담장 아래 진동하고, 갑작스레 풍경이 흑백에서 컬러로 변하며, 윗옷을 저도 모르게 벗게 되면 그게 바로 봄이다. 갑작스럽기에 반갑고, 시간을 보면 놀랍고, 변화에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는 그 계절이 사랑스럽다. 피천득 선생은 '오월'에서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고,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 가락지라 했다. 짧지만 그래서 더 강렬하고, 지나가면 자꾸 아쉬워 되돌아보게 된다. 봄은 새로운 시작이고, 간지러운 아련함이며, 조금은 멜랑꼴리하지만 시월처럼 쓸쓸하진 않다. 그런 봄처럼 갑자기 내게 희영(Hee Young)이 왔다.
     
    그녀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브루클린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싱어송라이터이자 이번 EP 앨범이 데뷔작인 동시에 우리나라보다 미국에서 먼저 소개되었다는 것, 그리고 Keane과 제임스 므라즈 등의 투어 파트너로 활약하는 앵그리드 미첼슨의 멤버 사울 사이먼 맥윌리암스가 프로듀싱했다는 것과 매체 및 시상식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정도. 그렇지만 그간 파스텔 뮤직에서 소개해왔던 여성 뮤지션들에 대한 호감도와 완성도가 결부돼 그녀와 음악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가 유난히 증폭되었던 건 사실이다. 그 기대를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유감없이 200% 만족시켜주는 희영의 사운드는 포크를 기본 바탕으로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동시에 달콤쌉씨름한 감성을 잔뜩 품은 감성의 노래들이다. 때론 우울한 므라즈스럽고, 보헤미안 정서의 데보츠카가 연상되기도 하며, 데미안 라이스의 목가적인 기운을 머금은 소박함이 봄햇살처럼 찬란히 쏟아진다.

    총 7곡의 노래가 실려있는 그녀의 EP는 경쾌한 리듬의 'Are You Still Waiting?'으로부터 시작한다. 산뜻하고 감각적인 비트감에 다소 허스키한 담백함이 묻어나는 보이스컬러로 조근조근 풀어나가는 이 곡은 소박하지만 흥겹고 세련된 편곡과 세밀한 질감을 잘 살린 연주가 기분좋게 다가온다. 지나가버릴 지도 모르는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는 자신의 심정을, 상대방의 감정을 타박하는 귀여운 슬픔이 묻어난다. 그 뒤로 이어지는 타이틀 곡 'So Sudden'은 앞선 분위기와 정반대의 멜랑꼴리한 기운이 완연한 노래. 가녀리게 떨리는 듯 스산하게 느껴지는 보컬이 첼로/바이올린 등의 스트링 세션과 만나 서정성과 절제된 감정을 고조시키는 드라마틱한 구성이 매력적이다. 절정부까지 그 감정을 오롯이 끌고오는 희영의 디테일한 접근법이 일품이다. 그 기운을 조금 더 숙성하고 침전시킨 듯한 'Do You Know'는 본 앨범 중 가장 어두운 심성이 투영된 까끌한 사포와도 같은 노래. 중간에 삽입된 이펙트와 스트링의 짧지만 점층적인 오스티나토로 쓰디쓴 맛에 방점을 찍는다.
     
    전환점을 돌아 네번째 곡 'Solid On The Ground'에 이르면 다시 봄날 아스란히 피어오르는 꽃가루처럼 생기 넘치는 노래를 들려준다. 통통 튀는 우쿨렐레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뮤직박스와 흥겨운 비트감을 선사하는 박수 소리, 휘바람과 스트링 그리고 기분 좋은 코러스가 어우러져 따뜻한 행복 바이러스를 마구마구 발산하는 사랑스러운 곡이다. 집시풍의 느낌을 새롭게 변주해낸 데보츠카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있었다면 오버일까. 그리고 이어지는 'On The Wall'은 (한국 버전에만 수록된 곡들을 제외하면) 이번 EP의 실질적인 마지막 곡으로 우울하고 서정적인 감수성으로 회귀한다. 짧은 곡이긴하지만 포크의 색채를 짙게 깔고 있는 이 노래는 그녀의 담백한 파스텔 톤의 보이스컬러가 유난히 빛을 발하고 있는데, 앞서 밝은 트랙들과 달리 묘한 질감의 울림을 선사한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뒤의 두 곡은 'Are You Still Waiting?'과 'So Sudden'의 한국어 버전. 영어와 한국어 가사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별 이질감없이 정서적으로 똑같이 다가오는 완성도가 놀랍다. 어디서고 자신의 노래를 만들어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정성과 보편성을 그녀가 갖추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게 아닐까.

    희영의 노래는 따뜻하면서도 아직은 쌀쌀한, 온기 속에 감춰진 짙은 외로움이 묻어나는 봄기운과 같다.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하지만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뮤지션의 출현에 더할 나위없이 잘 어울리는 가수다. 전형성을 넘어서 자신만의 온전한 기운을 봄바람처럼 씩씩하게 불어넣는 그녀의 따사로움이 조금 더 강해지길, 세어지길 기대하고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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