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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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스 브라운의 '레드 라이징'책|만화|음악 2015. 12. 10. 07:32
며칠간 책과 먼 생활을 해왔더니 문득 글이 읽고 싶어졌다. 내가 쓴 거 말고, 인터넷 기사나 댓글 말고, 실용서적 참고서적 말고, 새롭고 아주 긴 이야기가. 그런 바람을 들어주기나 한 듯 마침 가제본 서평 이벤트에 당첨돼 읽게 된 건 무지 두껍고도 이제 갓 출간된 소설이었다. [파리 대왕]의 [헝거 게임] 버전이라는 아주 그럴듯한 태그라인이 붙은 이 소설의 제목은 [레드 라이징]. 피어스 브라운의 장편 데뷔작이라 했다. 신선한 이야기에 목마른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달라붙어 영화화한다는 소식보다 사실 더 끌렸던 건 SF 성장담이라는 장르 때문이었다. 다 읽고 나니까 SF라고 부르기는 다소 민망하지만, 성장담에 방점을 찍고 있는 이 이야기는 한참동안 인기를 끈 [해리포터]를 위시한 [트와일라잇], [헝거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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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책|만화|음악 2011. 2. 15. 03:59
13편의 독특한 질감을 가진 듀나의 새 단편집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SF로 치부하기엔 스펙트럼이 너무 넓고, 환상 소설로 보기엔 지극히 냉소적이고 까칠하다. 그렇다고 호러로 묶기엔 얌전하고, 멜로로 받아들이기엔 끔찍하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그 장르의 경계에 선 듀나만의 얼터너티브한 글쓰기는 여전하다는 거고, 장르를 비틀며 재조합하며 현실의 트렌드를 오마쥬하는 동시에 조롱하는 농락의 솜씨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물론 취향을 타겠지만 이 지극히 불유쾌한 심보의 도도한 매력은 장르물에 대한 저변이 그리 넓지 않은 시절에 나왔던 [면세구역]이나 [태평양 횡단 특급] 때부터 기인하던 특징이기에 매우 반갑다. 뮬론 중단편을 묶은 [대리전]이나 [용의 이]도 그간 출간되었지만, 건조하고 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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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일의 '불청객'영화|애니|TV 2010. 9. 29. 02:58
아무런 정보없이 이 영화와 만났다면(인디 영화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당/연/히 그럴 리 적겠지만) 조악한 완성도와 어설픈 연기, 아스트랄한 내용에 심히 당황할 것이다. 그 안에 431컷에 달한다는 CG와 국내에선 보기 드문 전대미문의 스페이스 오페라(?)를 펼쳐보이는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충격적인(!) 비주얼을 선사하는 감독의 뻔뻔스럽고 극악(!)스런 상상력에 더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다. B무비와 디씨인사이드의 찬양자라는 솔직담백한 프로필만 봐도 이 영화가 어떤 스타일일지 대략이나마 짐작(이라 쓰고 편견이라 읽는다)이 되겠지만, 키치적이고 허술한 만듦새와 달리 그 이면에 담긴 현실에 대한 사유와 아픔에서 승화된 유머는 진실하다. 무모한 시도임에도 극장에 걸 용기와 끝까지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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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로드 앤탈의 '프레데터스'영화|애니|TV 2010. 8. 27. 20:33
불친절하지만 쉬크한 매력의 단선적인 플롯, 듣도 보지도 못한 놀라운 아이디어의 크리쳐, 정글에서 펼쳐지는 페쇄공포적인 액션 연출과 아놀드 슈왈제네거라는 스타성이 만들어낸 [프레데터]는 가벼운 발상에서 시작된 것(록키가 지구상에서 싸워야 할 건 ET밖에 없다는 농담에서 착안)과는 달리 묵직한 종족(!)간의 사투를 담은 강인한 생존기였다. 그러나 정체에 대한 설명을 배재함으로서 더 많은 가능성과 메세지를 담아낸 본편과 달리, 이후 만들어진 속편과 스핀오프들은 무리한 설정과 불필요한 묘사가 덧붙으며 점차 실망감을( 넘어 절망감마저) 자아낸 게 사실. 그렇다면 20년만에 본격적인 속편을 제작하게 된 로드리게스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아예 판을 바꿔버리고 충실히 1편으로 회귀하는 거였다. 허나 80년대 방식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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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영화|애니|TV 2010. 7. 21. 21:05
한낱 영화도 인간의 꿈에서 비롯된 부산물에 지나지 않으니,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라는 장르에 가장 어울리는 이야기를 찾아 영원한 꿈꾸기에 여념이 없다. 데뷔작 [미행]에서부터 [메멘토], [프리스티지] 그리고 두 편의 21세기 영웅담 배트맨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그가 끊임없이 탐구하고 전력투구를 해온 건 강한 리얼리티를 기반으로 한 플롯팅의 재구성. 정교하고 복잡한 구조로 판타지를 직조해내는 기술(技術)이야말로 기술(記述)의 기술(奇術)이 있어야 가능한 일. 놀란은 스케일과 비주얼에 앞서 무엇보다 찬탄이 나오는 세팅과 가공, 절정의 지배력으로 보는 이를 압도해나간다. [인셉션]은 이미 그 동안 수차례 존재해왔던 호접몽 영화들에 대한 총집편이자, 프로이드에게 바치는 전도서이고, 놀란의 절정에 선 사고실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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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렌 페이의 '프레그먼트'책|만화|음악 2010. 2. 2. 22:08
마이클 크라이튼 타계 후 그 뒤를 이을 자는 마땅히 없어 보였다. 방대한 지식과 고증에 바탕을 두고 현실에서 실현가능할 것으로 믿어지는 하이테크 기술을 스릴러 문법으로 풀어내는 그의 디스토피아적인 상상력은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고유의 것이었다. 뛰어난 문장가도 엉뚱한 공상가도 아니었지만, MIT와 하버드 의대를 나온 영화감독이자 소설가답게 유전 공학과 나노 기술, 기후 환경과 항공, 의학, 영상 그리고 역사서까지 넘나들며 반보 앞서 나간 전방위적인 믹싱 솜씨를 발휘했다. 더 이상 그런 팔방미인의 지적 칵테일을 마실 수 없다는 사실에 그의 부재가 두고두고 아쉬웠다. 여기 새로운 버전의 '쥬라기 공원'를 들고 나타난 신성 워렌 페이가 있다. 유전공학과 공룡을 들이밀진 않았지만, 판게아 이론에 진화론을 무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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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영화|애니|TV 2009. 12. 17. 19:48
눈부신 기술의 향연 속에서 제임스 카메론은 결국 영화의 본질에 대해 묻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더 나아가 삶에 대해서도. 이 영화에서 [포카혼타스]나 [늑대와 춤을], 미야자키 하야오까지 들먹이며 줄거리를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 오히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장자에서부터 워쇼스키 형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던졌던 삶과 꿈의 경계에 대해 그는 풀 3D라는 기술적 효과를 통해 모두가 체험할 수 있는 가상을 실현하는 데 방점을 둔다. [아바타]는 2D에 묶여있던 가상의 세계를 가장 실감나게 구현한 현실 체험이며, 동시에 110년전 영화라는 기술적 성취가 이룬 체험의 경이를 입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구현해보겠다는 - 테크니션으로서의 야심이 창창히 드러나는 - 영화 본연의 실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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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J. 소여의 '멸종'책|만화|음악 2009. 12. 11. 05:18
하드 SF는 재미있는 사고 실험이다. 만약이란 화두를 통해 인류와 사회에 대해 풍자하고, 새로운 과학적 상상력을 더해 기술적 진보를 일깨운다. 한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기발한 설정과 추론을 앞세워 그려낸 [멸종]은 이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누구나 생각했을 법한 타임머신과 공룡이란 소재를 엮어 지구 역사 속의 가장 큰 미스터리를 풀어내려 한다. 동시에 인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물음 또한 던져주며. 양자역학과 평행우주, 주기적 멸종설과 각 공룡들의 다양한 생태학적인 특징들이 교차되며 이론적 디테일을 견고하게 쌓아올리는 배경은 보너스. 이 소설의 진면목은 빠르게 달려가는 엔딩에 접어들면 나타난다. 꽝!하며 한방에. 다소 황당무계하고 어이없을 법한 스케일임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