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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진기의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책|만화|음악 2016. 6. 15. 23:38

    현직 부장판사 출신의 도진기 작가가 쓴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는 [붉은 집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정신자살] 그리고 작가의 또 다른 시리즈인 "진구 시리즈"와 크로스를 시도한 [가족의 탄생]을 거쳐 상/하 2권 분량을 자랑하는 [유다의 별]까지 무려 5편이나 이어질 정도로 작가가 오랜 기간 공을 들인, 국내에선 보기 드문 본격 추리소설 시리즈다. 의도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작품이 계속 되며 조금씩 스타일이 변하는 게 퍽 인상적인데, 본격추리물을 표방했던 [붉은 집 살인사건]과 알라바이 격파와 범죄 심리에 공을 들이는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이 트릭풀이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정신자살]에선 숙적 이탁오 박사를 등장시켜 사이코패스 스릴러 톤을 덧입히고, [유다의 별]에선 일제강점기 때 실제로 일어났던 백백교 사건을 들고 와 현재 사건과 교묘히 결부시켜 한국형 팩션에 도전하기도 했다. 이번에 새로 나온 고진 시리즈의 최신작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역시 기존 작품들과 달리 또 다른 시도를 꾀하고 있는데, 그건 바로 작가 자신의 나와바리(縄張り)인 법정물이었다.

    판사직을 내던지고 법의 테두리 안팎을 넘나들며 암약하는 변호사지만, 사무실도 없고 법정에 출석하지 않으며 오로지 뒷골목에서 번거로운 절차를 피하고 싶은 자들의 법률의뢰를 받아 자문과 해결을 해오던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드디어 다섯 편만에 법정에 데뷔하게 된 셈이다. [굿 와이프]나 [로 앤 오더], [앨리 맥빌] 등과 같은 미드나 존 그리샴으로 대표되던 법정물을 국내 실정에 가장 잘 맞게 쓸 수 있는 작가로 현직 판사만큼 잘 어울리는 직업이 또 어디 있을까. 도진기는 법정과 80년대 그리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세 가지 이질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본격 추리와 법정 다툼이 주가 되는 법정 미스터리를 만들어냈다. 물론 고진이라는 캐릭터의 특징과 소설적 재미를 위해 몇몇 부분들이 현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상황들과 다르게 전개되는 면도 있지만,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현직 판사의 눈으로 그려낸 법정 장면들의 생동감 넘치는 디테일과 전문적인 용어들은 제법 신선하고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익숙하게 보았지만 정작 국내 실정과는 너무도 다른 영미권 재판과 달리 한국 특유의 답답한 관료주의적 성향과 판사-검사-변호사 간의 생리를 적절하게 담아낸 터치도 인상적이다.

    배심원제도가 아직 확고히 정착되지 않은 터라 한국식 국민 참여 재판을 도입해 극적이고 설명적인 부분을 해결했으며, 80년대 학번 세대의 ‘로망’으로 잘못 비춰진 시대적인 잔인성을 담아낸 남녀 관계에 대한 접근법도 현재 남성혐오, 여성혐오가 이슈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눈여겨 볼 부분이다. 살인이 벌어진 공간 자체가 국내가 아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설정돼 트릭을 구사한 점은 전작들에 비해 조금 평범하게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지엽적인 사고에 갇혀 사건을 바라본다면 놓칠 수 있는 허점을 건들고 있어 구성에는 썩 어울리지 않았나 싶다. 다만 용의자의 수가 워낙 적고, 연쇄살인이 아닌 단 하나의 살인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기에 다소 단조롭고 무난하게 느껴지는 감도 없지 않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현재와 과거의 교차, 법정과 일상의 비교, 한국과 러시아라는 공간적 특색으로 심플한 구성에 변곡점들을 부여하고 있다. 또 그간 조력자로서 왓슨 역할을 충실히 해오던 이유현 경감의 역할이 다소 줄어들고 고진의 원맨쇼가 된 점도 조금은 아쉽지만, 법정물이라는 특수성을 생각해본다면 딱히 이경감이 감상을 늘어놓는 부분 말고는 현실적으로 딱히 할 일이 없어 보이긴 하다.

    앞으로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까. 작가의 본격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이 쉬 변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스타일에 대한 접근법은 지금과 같이 매번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도전했으면 좋겠다. 추리 변방으로 비춰지는 한국 장르물 풍토에서 시도할 가치들이 아직도 무궁무진하게 많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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