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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지피피의 'ALOHA OE'
    책|만화|음악 2011. 12. 18. 20:33


    매혹적이다. 편안함 뒤에 숨은 그 작고 예민한 개성까지도 사랑스럽다. 대한민국에 무수히 많은 가수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들과 겹치지 않는 - 이 듣도 보지도 못한 축복받은 감미로운 보이스톤은 가히 백만불짜리다. 캐시미어 외투결 같은 따사로운 중저음도 일품이지만 이불 속 솜털처럼 가뿐히 날아다니는 힘을 쭉 뺀 가성도 몽환적이고 낭만적이다. 그 사이를 유려하고 자연스럽게 오가는 담백한 기교는 눈에 띄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마술처럼 가뿐히도 청자를 사로잡는다. 로지피피에게 홍대의 노라 존스라는 찬사가 붙여진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노라 존스의 톤이나 스타일, 장르가 느껴진다기보단 그만큼 편안한 사운드를 갖췄다는 얘기다. 사실 일렉트로닉과 보사노바, 포크와 힙합, 락 등 다양한 장르의 경계를 쉽게 넘나드는 그녀의 분위기는 노라 존스의 재즈와 사뭇 다르다. 데뷔 5년차임에도 미니 앨범과 싱글이 전부인 그녀가 자신의 색채를 더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 드디어 대망의 정규 앨범 'Aloha Oe'를 발표했다.

    수록곡의 면면을 살펴보면 독학으로 음악을 배웠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만큼 노련하고 탄탄하다. 허나 독학으로 음악에 접근했기 때문에 전형적인 클리셰의 위험에서 빗겨날 수 있었다. 장르에 대한 부담감이나 편견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싱그러운 감수성과 독특한 시각으로 자신만의 소박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녀의 노래들은 사랑스럽고 풋풋하다. 상업적인 후크에 의지하지 않고 고전적인 기승전결의 방식으로 멜로디를 풀어내는 솜씨도 인상적이고, 달달하고 직설적이며 감성적인 가사들은 쉬운 노래만큼이나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분위기 있는 보이스의 마력과 적절한 편곡이 만나 깊이와 울림을 만들어내는 로지피피의 연금술은 메두사의 머리만큼이나 거부하기 어렵고 히드라보다 강력하다. 이처럼 소소하고 감성적인 노래들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부각시키는 여자 싱어송라이터를 만나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인데, 그녀의 본격적이고 전면적인 등장이 반갑고 또 놀라웁다.

    도입부를 장식하는 건 'Hello'라는 제목의 일렉트로닉 사운드. 도입부를 여는 트랙답게 안녕이란 단어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 곡은 간단하지만 명료한 영어 가사와 아름답고 몽환적인 멜로디로 그녀만의 색채감을 쉬 드러낸다. 가성으로 아직 자신만의 색깔를 투명하게 감추는 그녀의 보이스톤은 그 뒤 하이햇 터치와 함께 이어지는 타이틀곡 '고양이와의 대화'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그 신비함을 해소한다. 애완동물을 길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사랑과 소통을 다룬 이 로맨틱한 노래는 대중적인 멜로디와 인상적인 편곡, 유쾌한 가사와 독특한 음색까지 네 박자가 완벽하게 어우러진 킬러 트랙이다. 여리지도 강하지도 않은 리드미컬한 그녀만의 호흡과 음색은 그야말로 백미. 진중하면서도 팬시한 매력이 세련되고 감미롭게 귀에 안긴다. 호소력 넘치는 가성으로 부르는 '어른아이'는 센치한 일렉트로닉 팝. 젊은 날의 고민을 담은 가사의 무거움을 중화시키는 비트감와 그루브가 부드럽게 산들거린다.

     
    2009년 미니앨범 'Cozy Rossy Mini'에 실려 주말 인기 예능 '우리 결혼했어요' 삽입곡으로 유명해진 'Falling in Love'는 그녀의 천부적인 멜로디메이커로서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러브송. 사랑이 빠진 순간을 담아낸 달달한 가사와 후반의 산뜻한 플루트 음색이 덧붙여진 잔잔한 편곡이 도드러진 발라드다. 그러한 블링블링한 분위기를 이어나가는 '튤립' 역시 같은 앨범에 실렸던 곡이자 달콤하기 그지없는 - 혹은 다소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직설적인 화법의 애가(愛歌)로 보사노바만의 매력을 유감없이 선사한다. 노라 존스보다 리사 오노를 떠올리게 만드는 탁하면서도 부드러운 밀크티 음색이 정말 가사말처럼 너무 예쁘다. 그 뒤를 잇는 '별과 당신'은 피아노 한 대로 단아하고 심플하게 뽑아낸 목가적 소품. '어딘가에 잘 있을 너의 그 미소가 손을 흔들며 내게 건너오네'라는 인상적인 가사와 함께 옛 가요를 연상케 하듯 고풍적이면서도 성가스러운 느낌이 짠하고 애잔하다. 포크적인 접근에도 재능이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트랙이다.

    김추자가 부른, 이내 져버릴 것 같은 '꽃잎'이 아니다. 로지피피의 '꽃잎'은 앞선 '튤립'처럼 한없이 향기로운 보사노바의 향기를 마구마구 뿜어낸다. 살짝 허스키하면서도 담담하게 소화하는 그녀의 중저음은 끝없는 꿈길 속에 촉촉히 깔린 안개같은 스캣과 어우러져 고혹적으로 유혹한다. 꽃비 내리는 풍경화 같은 가사가 곡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뒤로 갈수록 싸이키델릭하게 펼쳐지는 신디톤과 빈티지스러운 LP 노이즈도 그 느낌을 강조한다. 사랑과 이별에 대한 20대 감성을 담아낸 'Love Fixer'는 시부야계 스타일의 곡. 그러나 기타톤이 전면에 나서며 그 전형성에서 살짝 비껴선다. '너는 뼈 중에 뼈, 나의 살 중의 살'이란 독특하면서며 과격스런(?) 표현이 재미있다. 조금 더 감성을 진하게 표출했다면 변화무쌍한 팔색조처럼 다가왔을텐데 보컬이 다소 아쉽게 느껴진다. 다양한 샘플링과 룸톤, 대화 등을 담은 믹싱으로 실험적인 면모를 보인 skit 개념의 'Subiaco'를 지나면 엔딩곡 'Goodbye'로 넘어간다. 시작을 알렸던 'Hello'만큼이나 엔딩에 걸맞는 단어나 영어 가사를 택한 수미상관적인 센스도 좋고, 시작이 일렉트로니카였던 것과 달리 어쿠스틱한 감성 모던락 스타일로 끝 맺는 것도 의미있게 느껴진다.
     
    10트랙 35분에 이르는 구성은 조금 짧다고도 느껴지는데, 그런 양적인 부분을 떠나 다양한 장르를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로지피피의 퀄리티는 상당히 풍성하다. 과하게 욕심을 부리면서까지 장르를 해체하지 않고 적절하게 자신의 스타일과 음색에 맞춰 곡 하나하나에 지장을 남기는 그녀의 실속은 요새 뮤지션스럽지 않은 고집과 철학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대중적인 감각까지 갖췄으니, 이 어찌 좋아하지 않으리오. 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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