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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기영의 'Woman Being'
    책|만화|음악 2010. 11. 6. 19:59

    내게 박기영은 '블루 스카이'로 '시작'된다. 세기말 그 시절엔 자우림과 더더(박혜경), 소찬휘와 김현정, 서문탁 등 쟁쟁한 여성 보컬들이 저마다 군웅할거하던 낭만이 존재했다. 물론 그 속엔 가녀린 몸에 이쁘장한 얼굴로 명징한 기타 사운드에 맞춰 깔끔하고 힘찬 목소리로 사랑과 젊음을 노래하던 그녀도 있었다. 비록 1집은 쉽게 기억나진 않지만 2집과 3집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들꽃의 향기를 내뿜던 그녀는 신선했다. 밴드에 소속되지 않은 보기 드문 여성 솔로 로커이자 싱어송라이터로 규칙적이진 않지만 꾸준하게 20대라는 큰 도화지 위에 자신의 색깔을 채워나간 그녀는 '산책'과 '나비', '그대 때문에' 그리고 몇몇 디지털 싱글로 여전히 현역임을 증명해냈다. 그리고 올 가을 결혼과 함께 자신의 일곱번째 앨범을 들고 돌아왔다. 들꽃에서 고혹적이고 성숙한 향기를 품은 여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이젠 인정해야겠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그녀도, 그걸 듣는 나도 세월이 지나 나이가 들었음을. 그리고 그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임을. 변화는 생소하지만 당연한 수순이다. 사랑의 열병에 가슴뛰고 시름시름 아파하며, 꿈과 내일에 절실히 호소하던 젊음도 이제는 그 때만큼 절박하지 않다. 오히려 곰삭은 감정의 잔해만이 추억이라는 변명 아래 아름답게 미화되고 반추하게 될 뿐,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주름진 삶의 여백을 읊조릴 여유마저 생기게 되었다. 박기영이 이번에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들은 그래서 애절하고 가슴 시리지만 불안하지 않다. 4년전 6집 'Bohemian'에서 어디를 붙잡아야 지탱할 수 있을까 위태로워 보이던 어둡고 매마른 날카로움도 사라졌다. 여전히 호소력 짙고 파워풀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애상哀想이 아닌 애상愛想에서 나오는 분출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변화는 긍정적이다. 지난 십여년의 세월을 관통하며 지금까지 건재한 여성 싱어송라이터이자 로커를 만나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 일곱번째 앨범을 받았을 때 그런 설레임을 숨길 수 없었다.
     

    1. 안녕
    어쿠스틱 기타와 첼로, 바이올린 등 현의 뒷받침이 도드라지는 조용한 발라드로 포문을 연다. 마치 2년전 발표한 어쿠스틱 베스트 앨범이 살짝 떠오르기도 하는데, 모든 것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슬픈 가사가 답답하리 만치 절제된 가성의 보이스와 어우러져 더 진한 슬픔을 자아낸다. 큰 임팩트와 존재감을 남기는 곡은 아니지만 그런 만큼 여운이 더 짙게 남는다.
     
    2. 꼭 한번만
    코나(kona) 시절의 발라드 감수성이 물씬 묻어나는 배영준이 기타리스트 조삼희와 함께 만든 곡으로 타이틀곡으로 뽑혀도 손색이 없을 만큼 드라마틱한 진행이 돋보이는 명품 발라드다. 고급스런 스트링 편곡이 덧입혀지며 스케일의 미학이 애절한 외사랑의 호소를 부각시키는데, 여기에 불을 지르는 건 박기영의 시원스런 고음이다. 여성 보컬을 대표하던 세월이 빛을 발하는, 이 앨범의 필청 트랙.
     
    3. 빛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일기예보/러브홀릭스의 강현민이 만든 발라드. 가까이 있으면 눈부시지만 없으면 어두운 빛의 이중성을 외로움으로 빚대어 토로하는 감정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속삭이듯 읊조리는 초반이 지나며 폭발하는 호소력은 박기영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상업적으로 확 와닿는 훅(Hook)이 다소 약하게 느껴지는 진행이 조금 아쉽다. 이를 만회하는 건 역시나 속이 꽉찬 강현민만의 놀라운 편곡!

    4. Dear
    종교적인 이유가 담겼다고는 하지만 대상을 생략하고 동양적인 감수성을 품은 멜로디 라인이 스트링 편곡과 혼성 4부 코러스와 만나니 강렬한 사랑의 락발라드가 탄생되었다. 단촐한 피아노로 시작해 점층적으로 고조시키는 진행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이를 지배하는 박기영의 쭉 뻗어가는 고음과 파워가 소름 끼치도록 압도적이다. 그녀의 매력을 유감없이 느낄 수 있는 곡.
     
    5. One Love
    클래지콰이의 DJ클래지 김성훈이 작곡한 곡으로 네이밍에서 오는 일렉 사운드에 대한 기대감(?)을 여지없이 배신(!)하는 어쿠스틱 발라드다. 하지만 여지껏 박기영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한 색채감과 보이스의 매력을 물씬 느낄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달달하면서도 부담없이 가볍게 가성으로 소화한 창법이 사랑이란 두근거림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6. Secret Love
    과거 박기영표 락발라드와 만나고 싶다면 주저없이 이 곡을 뽑겠다. '나비'와 '그대 때문에'를 떠올리게 하는 전형적인 박기영만의 사운드로 힘있는 드럼비트와 일렉 기타, 애절한 창법이 어우러지며 그녀다움을 충족시킨다. 남편과 자신의 비밀 연애를 하던 시기의 이야기를 담아낸 만큼 진실되고 또 (이제와 그렇겠지만) 여유로운 자세가 묻어난다.

     
    7. This Love
    일렉트로니카 내음이 물씬 풍기는 퓨전 락사운드로 그녀의 비음 섞인 보이스컬러가 무엇보다 매혹적이고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남겨진 자의 비애감, 후회 그리고 처량함을 담은 가사가 뚜렷한 훅과 만나 쉽게 각인되는 게 현재의 음악 트렌드와도 맞닿아있다. 지극히 변화를 꿈꾸지 않았던 그녀 스타일에 비춰 이런 일련의 일렉 사운드가 새로운 모험인지 단발성 실험인지 궁금함을 자아낸다.
     
    8. Flash Dance
    전 트랙에 비해 보다 더 본격적이고 직접적인 일렉트로니카 댄스. 박기영에게 댄스곡이 다소 생소한 조합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의외로 제법 잘 어울린다. 소찬휘가 락을 했듯 폭발적인 가창력 앞에서 장르는 그저 부수적인 문제일뿐. '달'과 함께 이 앨범에서 유일하게 사랑에 대해 노래하지 않는다. 박기영이 직접 작곡했음에도 유난스레 W의 곡처럼 느껴지는 건 김상훈의 편곡 때문일까.
     
    9. 달
    몽환적이고 쓸쓸한 감수성이 묻어나는 일렉트로니카. 후반부에 이르러 오버더빙된 코러스를 듣고 있으면 언뜻 엔냐를 떠올릴 만큼 그녀의 조심스럽고도 가냘픈 가성은 인상적이다. 삶을 바라보는 그녀의 관조적이고도 사색적인 시선이 멜랑꼴리한 분위기와 어우러지며 앨범에서 이질적인 존재감을 과시한다. 역시나 박기영이 직접 작곡했음에도 그녀 곡 같지 않게 느껴지는 건 또 다른 W의 멤버인 한재원의 편곡이 놀랍기 때문.
     
    10. 가요
    조근조근 시작했다 중반 이후 감정을 폭발시키는 발라드에서 무엇보다 박기영의 진가가 드러나지만, 문제는 같은 앨범에서 이런 스타일이 반복되면 그 감흥이 덜하다는 거. 타이틀 곡인 '빛'과 유사한 진행의 이 곡은 그런 면에서 애절한 가사와 혼이 담긴 목소리, 완성도 높은 편곡이 맞물렸음에도 2% 아쉽게 다가온다. 하지만 박기영표 발라드만의 장점을 보여주기엔 충분하다.
     
    11. 나예요
    이미 몇 차례 공동 작업을 한 바 있는 러브홀릭스의 멤버 이재학과 박기영이 같이 만든 곡. 앞서서 접한 '꼭 한번만'처럼 클래식컬한 선율이 귓가에 맴도는 한국형 발라드다. 역시 타이틀곡으로 밀어도 아쉽지 않을 만큼 드라마틱한 전개가 인상적이고, 감정의 강약조절이 완벽하게 구사된 박기영의 노련하고 파워풀한 보컬을 유감없이 접할 수 있는 곡임에 틀림없다.
     
    12. 어떻게 저를 알았나요
    이바디의 임거정이 선사한 노래로 독특한 서정성과 스트링 편곡이 인상적이다. 마치 운율을 가지고서 방백하듯 중얼거리는 박기영의 보컬이 뮤지컬 넘버같기도 한데, 그간 그녀에게서 전혀 접해보지 못한 분위기와 카리스마를 부여해준다. 마지막 트랙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더할 나위없이 드러내는 인상적인 변화이자 강렬한 변신! 
     
     
    다음 앨범에서 만나게 될 박기영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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